존엄사, 품위 있게 죽을 권리? 의무?

지난 2009년 말기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를 제거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원의 결정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존엄사가 인정되었다. 이후 2016년 의료결정법이 제정되며 연명의료의 중단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환자의 신체 침해를 수반하는 구체적인 진료행위가 환자의 동의를 받아 제공될 수 있는 것처럼 그 진료행위를 계속할 것인지의 여부에 관해 환자의 결정권 역시 존중돼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임종을 앞둔 환자가 사전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 이를 중단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한국에서 말기 환자들에 대한 의사 조력자살(Phsysian Assisted Suisde)이나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불법이다.



존엄사 논쟁은 과거부터 꾸준히 존재했지만 과거에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육체적 고통의 제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최근에는 존엄하게 죽을 환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해도 적극적 안락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가는 네덜란드, 벨기에 등 소수이며 의사조력자살을 인정하는 국가 역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안락사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일명 ‘죽음의 의사’ 닥터 케보키언이다. 미국의 의사로 1980년대 말기 환자들의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마취 주사와 약물을 이용해 130명의 자살을 도왔다. 그는 조력 자살 혐의로 여러 차례 기소됐지만 당시에는 이를 금지하는 법령이 없었기 때문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98년 루게릭병을 앓고 있던 환자에게 직접 약물을 주입하면서 살인죄로 25년 형을 선고받아 2007년 가석방 후 사망했으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에서 일명 ‘죽음의 의사’로 불리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키보기언의 조력 자살에 의해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1994년 12월 존엄사법을 통과시켜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 법에 따라 실제로 1998년 80대 중반의 말기 유방암으로 고통받던 환자에게 최초의 의사조력 자살이 시행됐으며 이후 미국의 10여 개의 주가 오리건주를 따라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했다.

한국은 이와는 다르게 ‘무의미한 연명의료의 중단’을 법제화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대법원판결 이후에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법령을 제정하는 것까지 7년이 소요되었고, 법 제정 이후에도 실제 존엄사법 시행은 2018년으로 불과 4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지난 6월 안규백 의원이 조력존업사법을 발의하면서 최근 다시 논쟁에 불이 붙었다. 말기 환자이면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경우, 환자의 본인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경우 등 조건을 만족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법안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상당히 높은 편으로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조력존엄사 입법화 찬성의견이 무려 82%에 육박했다.

찬성 이유로는 자기 결정권 보장 25%, 품위 있는 죽음에 관한 권리 23%, 가족 고통과 부담이 20%였는데 흥미롭게도 세대별로 입법 찬성의 이유가 상당히 달랐다. 자신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29세 이하의 젊은 층의 경우 ‘자기 결정권 보장’, 60세 이상 노령층은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로 찬성 이유를 선택했지만 부양의 책임이 많은 40대는 ‘가족 고통과 부담’을 꼽아 경제적 이유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2016년 이와 관련한 조사에서는 41%의 국민만이 찬성하던 것을 감안하면 갈수록 존엄한 죽음에 대한 국민적인 찬성과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론조사 몇 가지와 추이를 보고 국민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법제화할 가벼운 사안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찬성 이유에서 번번이 등장하고 있는 가족 고통이나 부담, 의료비 및 돌봄으로 인한 사회적인 부담 등 경제적인 이유들은 자칫 저소득층 등 사회적인 약자들에게는 오롯이 자기 의지에 의한 ‘존엄한 죽음’이 아닌 가족이나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선택해야만 하는 ‘의무’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안규백 의원의 발의안을 계기로 윤리적, 철학적, 법률적인 문제까지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진지한 논쟁과 토론을 해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의사협회에서 시기상조라도 단언했듯 성급하게 법제화를 서두르기보다는 현실적인 대안부터 고려하는 것이 순서이다. 2016년 연명결정법 제정이후 2018년 호스피스 돌봄이 시작되었지만 이용 가능한 질환은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인프라 부족으로 대상 환자 중 21% 정도만 호스피스 돌봄을 받는 설정이다.

반면 영국의 호스피스완화의료기관 이용률은 무려 95%에 육박한다. 성공회 등 생명윤리를 중시하는 영국 종교계의 영향이 크지만 영국이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고 있지 않은 데에는 높은 호스피스 돌봄이 해답의 실마리일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의료결정법의 제정 당시 의료계에서도 기계장치에 의존해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공론화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력의 당사자들인 의사들은 생명을 돌보고 지키는 의사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에서 갑자기 ‘죽음의 의사’라는 역할을 떠안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조력존엄사법 통과 이전에 존엄한 돌봄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의 인력확충과 다양한 만성질환 말기 환자들에 대한 호스피스완화의료 이용기회를 넓히는 일에 정부와 국회가 먼저 힘을 쏟아야 한다.

<저작권자 ⓒ 의사나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