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한지 44일 만인 20일(현지시각) 사임했다. 9월 6일 취임 직후 발표한 대규모 감세정책이 인플레이션 자극 우려 등으로 금융시장을 극심한 혼란에 빠뜨린 뒤 재무장관 경질 등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후폭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트러스 총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총리직을 지낸 기록을 남기게 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BBC 방송 등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는 이날 오후 1시 30분 총리 관저인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자리에서 사임 계획을 밝혔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국제 정세적으로나 매우 불안한 시기에 총리에 취임했다”면서 “영국이 낮은 경제 성장으로 인해 너무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있다”고 운을 떼었다.

이어 자신이 이것을 바꿀 권한을 가지고 취임했다고 말했지만 곧 “상황을 감안할 때 내가 보수당에 의해 선출된 임무(총리)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거공약을 지킬 수 없어 물러난다”며 사임 의사를 전했다.

트러스 총리는 다음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는 총리직을 계속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영국 총리는 의회의 다수당 대표가 자동으로 임명되며, 현재의 다수당인 보수당 당 대표 선거가 다음주에 끝난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번에는 보수당 의원들만 투표하고, 전체 당원 투표는 하지 않는다.

이날 트러스 총리가 오후 현장 방문과 언론 인터뷰 일정을 갑자기 취소해 사임설을 야기했다. 트러스 총리는 관저에서 보수당 원로와 내각 장관 등을 잇따라 만나 향후 행보 등을 논의한 끝에 사임 의사를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 9월23일 50년 만에 최대 규모인 연 450억파운드(약 73조원) 규모 감세안이 포함된 예산안을 발표했다. 감세가 경제 활성화와 성장을 이끈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한 정책이었지만 금융시장은 대책없는 감세로 정부가 대규모 신규 국채발행에 나서서 인플레이션을 다시 10%로 이상으로 치솟게 할 것으로 보고 영국 자산 매각에 나섰고, 파운드화 가치와 국채 가격이 역대 최악으로 폭락했다.

그는 감세의 미니 예산안을 성안 발표했던 콰시 콰탱 재무장관을 지난 14일 물러나게 하고 제러미 헌트 전외무장관을 전격 기용했다. 그러면서도 트러스 내각은 전체적인 감세 기조를 유지할 뜻을 밝혀 시장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 새로 기용된 헌트 새 장관은 17일에 450억파운드 감세안 대부분을 취소하겠다고 해 트러스 총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보수당 하원의원들 사이에 총리 퇴진 목소리가 커졌다.

19일에는 수엘라 브레이버먼 내무장관이 공문서를 개인 이메일로 동료 의원에게 보내 정부 규정을 위반했다며 사의를 밝혔다. 그는 “공문서는 이민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유출 시 큰 파장을 미칠 수 있었다”며 “저는 실수를 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했다.

영국 현대정치사상 최단명(43일) 내무장관이 된 그는 트러스 총리를 향한 불만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우리는 명백하게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고, 저는 이 정부의 방향에 대해 염려를 표한다”고 말했다.

쿼지 콰텡 전 재무장관이 38일 만에 경질된 데 이어 핵심 우군 출신 각료가 또다시 물러나면서 트러스 총리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후임 총리로는 트러스 총리의 경쟁자였던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 제레미 헌트 현 재무장관, 페니 모돈트 국제무역장관, 벤 월리스 국방장관 등이 거론된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야당인 노동당 대표인 키어 스타머는 즉각적인 총선을 요구했다. 그는 트러스 총리의 사임 발표 뒤 성명에서 “보수당은 더 이상 통치할 권한이 없음을 보여줬다”며 이같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