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없다면 보내줘” 환자가 요청해도, 의사는 호흡기 뗄 수 없다

- 현행법상 활력 징후가 없는 임종과정에 들어선 환자만 연명치료 중단 가능
- “애매한 기준 없애서 환자 고통 줄여야”

무의미한 삶의 연장치료에 환멸을 느끼고, 환자가 이를 중단하기를 미리 요청하더라도 의사는 여전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의사에게 유일한 선택지는 연명치료를 계속 하는 것뿐이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입원해있던 70대 폐암환자 A씨는 최근 암세포가 뇌와 간, 림프선 등으로까지 전이됐다. 이에 항암치료, 전뇌방사선 치료 등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A씨는 의식이 희미해져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검사를 통해 뇌와 뇌막 전이, 간질 발작 등이 확인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의료진은 추가 암치료와 중환자실 치료가 환자의 의식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않는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환자의 가족들에게 기관절개를 통해 간이 인공호흡기를 부착하고 요양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다.

A씨의 아내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A씨가 평소 “의식없이 누워만 있다면 그때는 편하게 보내달라”고 말해 온 것을 떠올렸다. 이에 A씨는 의료진에 “요양병원으로 가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누워만 있을텐데, 그건 의미가 없다. 간이 호흡기를 단 환자는 호스피스에서 받아주질 않는다”며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했다.

의료진은 A씨의 아내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의료진은 “현행법상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말기 암이긴 하지만 활력 징후(체온·심장박동)가 어느 정도는 잘 유지되고 있고, 중환자실에서 나가도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으면 얼마동안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다”고 A씨의 아내를 설득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A씨와 남편의 뜻을 존중하려는 아내, 하지만 법 준수를 해야 한다는 의료진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A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나 숨을 거뒀다.

의료진이 말한 ‘현행법’은 바로 연명의료결정법이다. 해당 법안에 대해서 의료계 일각에서도 허점이 지적당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한국의료윤리학회 학술대회에서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도 말기와 임종과정으로 구분하고 있는 현행 법률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 상 말기는 근원적인 회복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예상된다는 진단이 나온 환자를 말한다. 반면 임종과정은 회상 가능성이 없고, 증상이 악화해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말기환자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으나 연명의료결정은 임종과정인 환자만 가능하다.

연명의료 중단제도(일명 존엄사)가 시행된 지 5년 지났다. 27일 현재 29만 702명이 중단(유보)하고 세상을 떴다. 연명의료 행위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이며 유보는 이런 걸 아예 시작하지 않는 걸 말한다. 5년 새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를 바라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국민신문고·국민생각함이 지난해 9,10월 6200명에게 연명의료 중단 시기를 물었더니 47.7%가 '말기환자까지 중단이 가능하도록 허용해야'라고 답했다. 18.1%는 '말기 이전에도 허용해야'라고 답했다. 지금처럼 '임종환자에게 허용'은 34.2%에 불과했다. 중단 시기를 앞당기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면 현행 법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말기 단계에서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반영하기는 어렵다”며 “말기와 임종과정으로 구분하다 보니 말기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면 인공호흡기 등의 치료를 우선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 나중에 임종과정이라는 판단이 나오면 중단한다. 연명의료에 노출돼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 침해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말기와 임종과정을 구분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도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도 했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도 “현행법은 연명의료 중단에만 맞춰져 있다. 연명의료 결정 이행자의 90%가 유보한 경우인 점을 감안하면 법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고윤석 교수는 “현행 법률에서 '임종과정 환자'를 삭제하고, 말기에서 연명의료 결정을 이행하도록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되면 A씨의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거나 제거할 수 있다.

환자단체는 신중하다는 입장이면서도 관련 논의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 후 경제적 이유 등으로 남용 사례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연명의료 결정 이행 시기 확대를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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