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필수의료 과실 판결… "사법부 판단 기준, 이젠 바꿔야"

데이트 폭력 피해자 사망 사건… 의료진 과실 인정 판결 논란
의료계 "정맥관 삽입 시 관통은 합병증… 과실 판단 지나쳐"
미국 EMTALA 가이드라인 사례 주목… "한국도 법적 기준 개선 필요"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응급수술 도중 사망한 사건에서 의료진이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자 의료계에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의료진은 응급처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을 의사의 과실로 판단하는 현 시스템이 의료 현장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경막외출혈 응급수술 중 사망… 법원 "의료진 과실 인정"


해당 사건은 2017년 10월 데이트 폭력으로 경막외출혈 등 상해를 입은 피해자 A씨가 병원에 이송돼 긴급 수술을 받던 중 사망한 사례다. 수술 과정에서 목 안의 내경정맥 중심정맥관 삽입 시술 중 동맥에 1~2mm의 관통상이 발생해 과다출혈로 숨졌다.

1심 재판부는 "해당 의료진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상태로 시술을 시도해 관통상을 야기한 과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또한 "시술이 흔히 시행되는 술기이지만, 합병증이 보고되는 만큼 의사는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환자 가족에게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며 병원과 의료진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의료계 "과실 인정 과도… 응급 상황 시술 위축 우려"


그러나 의료계는 법원의 판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내경정맥 중심정맥관 삽입 시술 중 내경동맥이 관통되는 합병증은 해부학적 구조상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사례이며, 이를 의료 과실로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다.

용인세브란스병원 이경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내경정맥과 내경동맥은 해부학적으로 나란히 위치해 있어 시술 과정에서 관통상이 발생할 수 있다"며 "대개 주사침 제거 후 압박 지혈로 해결이 가능하며, 해당 환자의 사망은 경막외출혈이 증가해 뇌간이 압박된 것이 더 큰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아응급 전문의 B씨는 "이번 판결 이후 중심정맥관 삽입 시술을 자주 수행하는 의료진 사이에서 '앞으로 시술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불안이 확산됐다"며 "응급상황에서 필요한 시술이지만, 법적 책임을 우려해 기피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이형민 회장도 "동맥 관통은 응급 시술에서 종종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인데, 이를 과실로 판단하면 앞으로 정맥관 삽입 시술을 기피하게 되는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EMTALA 사례… "가이드라인 준수 시 면책"


전문가들은 한국의 의료사고 판단 기준이 '최선의 진료를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의료진이 결과 책임을 지나치게 부담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EMTALA(응급진료 및 분만법)을 통해 의료진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료를 수행했다면 형사·민사적 책임에서 면제받도록 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2015년 미국 메모리얼 병원 사건이 있다. 복통을 호소하던 30대 여성 환자가 병원에서 EMTALA 가이드라인에 따라 혈압·혈액 검사, 복부 CT 검사를 받은 뒤 위장장애로 진단돼 퇴원했다. 하지만 환자는 몇 시간 후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고, 유족이 의료진을 고소했다.

법원은 "의료진이 가이드라인을 성실히 따랐으며, 진료 당시 임상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로 판단됐다면 예측하지 못한 합병증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며 병원의 손을 들어줬다.

이형민 회장은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의료사고 판단 기준을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로 명확히 설정했다"며 "한국도 현장 의료진이 주의 의무를 다했다면 면책받을 수 있는 법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도한 책임 부담, 의료 기피로 이어질 수도"


의료계는 이번 판결이 의료진의 위축을 넘어 의료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대한외상학회 조항주 이사장은 "정맥관 삽입 시 환자마다 혈관 구조가 달라 합병증 발생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며 "과실로 판단되는 사례가 늘어나면 위험이 있는 시술 자체를 회피하려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 응급의학과 교수도 "한국은 의료진의 주관적 과실 여부를 중시하는 반면, 미국은 가이드라인을 따랐는지를 본다"며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응급 시술조차 법적 부담으로 기피된다면 결국 환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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