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업무강도와 많은 근무시간에도 수가 낮아 보상 ↓... 결국 의대생들 기피
- 필수의료 기피 의대생 62.6% “평균 수준의 보상 제공되면 필수의료 고려”
9일 새벽 자정 무렵, 수도권의 한 종합병원 전공의 당직실에는 외과 중환자실 레지던트 2년 차 A(31)씨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업무용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닥터 노티(병동 간호사의 당직 의사 호출)을 받고 A씨는 부랴부랴 토막잠을 자는 동료들이 깨지 않게 까치발을 들고 당직실을 떠났다. A씨는 격일로 26시간 30분씩 당직을 서고 있다.
A씨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환자를 돌보고 있으면 내 생명을 쪼개서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기분이다”고 말했다. A씨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외과 집도의의 꿈을 품고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 꿈이 무너지는 것까지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단 A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필수의료 전문의들이 A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련을 마치면 대학병원을 떠난다. ‘덜 힘든 일자리’를 찾거나 동네 개인의원을 차리기 위해서다.
◆ 수 년이 지나면 의사가 없어 수술 받지 못할수도 있다
매년 대학 입시에서는 전국 최상위권 학생 상위 3,058명이 의대에 간다. 전국의 의대 정원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더욱 의대 선호 현상이 짙어지면서 의대가 KAIST 등 이공계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드린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환자의 생사를 두고 사투를 벌이는 대학병원의 필수의료 병동엔 의사가 턱 없이 부족하다. 선천성 심장병, 미숙아 등을 담당하는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올해 전공의 충원율이 25.5%에 불과하다.
한 언론사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의대생 246명이 ‘기피하는 전공’으로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산부인과들 꼽았다. 필수의료의 대표적인 과목들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수년이 지나고 지금의 필수의료 과목의 의사들이 은퇴하면 의사가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워라밸을 찾는 새내기 의사들,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2016년 시행된 전공의 특별법에 따르면 근무 시간을 주당 80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전공의협의회가 발표한 2022년 실태자료에 따르면 전공의 절반 이상(52%)이 주당 근무시간 80시간을 초과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과목별로는 훙부외과(100%), 외과(82%), 신경외과(77.4%) 등 필수의료 과목에서는 대다수가 초과 근무를 할 정도로 높았던 것에 비해 피부과(15.2%), 마취통증의학과(22.2%) 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런 과목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격차는 의대생들이 필수의료 전공을 기피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이다. 위 언론사의 자료를 다시 따르면 필수의료 과목을 ‘기피 전공’으로 꼽았던 의대생의 67.1%가 “전문의가 된 이후의 삶의 질을 기대하기 어려워서”라고 답했고, “전공의 시절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서”라는 답변도 61.1%에 달했다.
이달 말 서울 소재의 의대 졸업을 앞두고 있는 B(26)씨도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의사를 꿈꿔왔으나 이를 최근 포기했다. B씨는 “신경외과 교수님들이 최소 3시간이 걸리는 수술을 하루에 4건, 많게는 5건까지도 하시더라”며 “내 체력으론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B씨는 1년 인턴생활을 한 뒤 재활의학과 전공의 자리에 지원할 생각이다. B씨는 “재활의학과 전공의들은 병원에서 화장까지 하고 다니더라”라고 씁쓸해했다.
◆ ‘워라밸’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꿈과 사명감으로 ‘워라밸’을 포기한 채 필수의료에 뛰어든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기대소득은 다른 과목보다 오히려 낮다. 업무 강도는 다른과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높은데, 그에 따른 보상은 더 적다. 필수의료 과목 지망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답한 의대생들의 절반 이상(52.1%)은 “필수의료 과목에서 가정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터무니 없게 낮은 보상(수가)”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62.6%는 “업계 평균 수준의 보상이라도 보장되면 필수의료 과목을 고려할 의사가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에 최근 길병원에서 대란 논란이 일기도 했던 소아청소년과는 결국 의대생들이 가장 선택을 꺼리는 ‘기피과목 1순위’가 됐다. 소아청소년과는 아동을 위한 진료과목인 만큼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의료지만 개원의 1명당 연 평균 소득이 1억 875만 원(2020년 기준)으로 업계에서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의사 전체 평균(2억 3,070만 원)의 절반도 되지 못한다. 합계출산률이 0.7명까지 떨어진 초저출산 추세를 감안하면 미래는 더욱 어둡다.
박은철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건강보험 수가가 필수의료 분야 진료나 수술에 대해선 낮게, 검사에 대해선 지나치게 높게 책정돼 있다는 점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장비 등 고가 검사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쓴 돈이 수가에 반영되면서 검사 비용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됐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병원은 인건비가 싼 전공의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과한 업무를 못 견뎌 필수의료를 떠나는 젊은 의사가 늘어난다. 반면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과목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최신 기술이 하루가 멀다 하고 개발돼 과목 간 소득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강남의 성형외과 개원의 중에는 본래 전공이 성형외과가 아닌 외과 등 필수의료 과목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가 숨졌다. 뇌동맥류 결찰술을 받으면 살 수 있었다.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의(교수)는 이 병원에 2명뿐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출장 중이었다. 전국에서 이 수술이 가능한 숙련된 의사는 133명뿐이며, 이 중 상당수가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필수의료 체계를 살릴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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