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안하려는 배석판사들... 내부에서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 줄 이어
법원 판사들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관련자들과 언론 등을 위해 재판을 제때 처리하려고 쉴 새 없이 일한다. 평일 밤 늦게까지 불이 여전히 들어오고 있는 판사실이 많은 것은 이런 판사들의 노력이 사실임을 잘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주말에도 출근하는 판사들이 많다.
법원에서는 이들을 위한 ‘벙키’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이다. 벙키는 벙커(bunker·골프장 모래 구덩이)와 루키(rookie·신인)의 합성어다. 일을 맡겨도 제대로 결과를 내놓지 않는 젊은 판사를 뜻한다. 부장판사들이 함께 근무하기 싫은 후배 배석판사를 가리킬 때 이 말을 쓴다.
과거에는 재판부를 권위적으로 운영하며 부당하게 일을 과도하게 시키는 부장판사들을 ‘벙커’라고 불렀다. 배석판사들의 기피 대상으로 부장판사들이 곤욕을 치루던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판사는 “법워마다 나타나는 ‘벙키’ 배석판사들의 사례를 보면 황당을 뛰어넘어 화가 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 지방법원에선 배석판사가 소속 부장판사에게 “실연(失戀)을 당했으니 앞으로 적어도 한 달간은 판결 선고를 못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지방법원에서는 “이혼하면서 받은 충격이 심각해 3개월 동안은 판결문을 못 쓰겠다”는 배석판사도 나왔다고 한다. 또 “스포츠 대회에 나가기 위해 몸 만들기를 해야 하니 내가 맡은 사건의 판결 선고는 석 달간 날짜를 잡지 말아 달라”고 한 배석판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3인 재판부에서 판사 1명이 재판을 안 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다른 판사 2명에게 넘어가고 재판도 늦어지게 된다. 판사 출신인 변호사는 “개인 사정으로 재판을 못 하겠다면 휴가나 병가를 내야지, 판사 월급은 받으면서 사실상 재판은 거부하겠다고 하는 식의 행동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부장판사들이 ‘벙키’ 배석판사들을 견디다 못해 법원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건을 맡은 배석판사가 판결문 초안을 만들면 재판장인 부장판사가 사실 관계와 법적 논리를 검토해 판결문을 확정하게 된다. 그런데 한 지방법원에서는 배석판사가 출퇴근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판결문도 부실하게 쓰면서 부장판사가 아예 판결문을 대신 써주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부장판사가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건강이 상해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해당 배석판사는 업무 시간에 재테크 등 개인 업무에 몰두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지방법원에서는 새로 부임한 부장판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지시를 거스르는 식으로 ‘길들이기’ 하려는 배석판사들 때문에 부장판사가 스트레스를 받아 질병을 이유로 휴직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부장판사가 잘못된 판결문을 바로잡아 주면 ‘왜 내가 쓴 판결문을 마음대로 고치느냐’며 항의하는 배석판사도 있다는데, 이런 경우는 아예 판결문을 쓰지 않으려는 배석판사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라고 말했다.
‘벙키’ 배석판사들을 피하려고 부장판사들로만 구성되는 대등 재판부 근무를 자원하는 부장판사도 느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등 재판부에서는 부장판사 세 명이 같은 비율로 사건을 나눠 맡아 모든 판결문을 직접 써야 해 업무 부담이 크지만, 배석판사들 때문에 골치 아플 일은 없다는 것이다.
‘벙키’ 배석판사 문제가 심각한 상태이지만 이들에 대한 제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일로 징계에 회부된 경우도 없었다. 헌법상 판사는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않으면 파면되지 않게 돼 있다. 판사들도 근무 평정을 받게 돼 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법조인은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들어 법원의 인사 제도가 완전히 거꾸로 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017년 9월 취임 이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폐지하고 판사 투표를 통한 지방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해 “실력과 업적을 통한 승진 시스템을 없애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법조인은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되더라도 쉽게 되돌리기 어려운 지경까지 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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