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병원 9곳, 수도권에 분원 11곳 설립 추진
- 의사 공급 고정된 상태에서 신규인력 모집해 지방 의료인력 유출 우려
대학병원들이 서로 경쟁하듯 수도권 지역에 분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이로 인해 발생할 지방의 의료인력 유출이 지역 의료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의료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소위 ‘빅5’로 불리는 연세 세브란스 병원은 인천 송도, 서울아산병원은 인천 청라, 서울대병원은 경기도 시흥에 8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의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과 인하대 병원 역시 서울 송파와 경기 김포에 분원 설립을 검토하고 있고, 고려대, 경희대, 한양대 의료원 역시 과천, 하남, 안산 등지에 500 병상 정도의 병원 설립 계획을 가지고 있다.
9개 대학병원들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수도권 분원 11개 병원이 모두 완공되어 정상적으로 개원하는 2028년 이후에는 수도권에 현재보다 최소 6600개의 병상이 추가되게 된다. 현재 서울·경기·인천에 있는 대형 병원의 병상 수는 3만 여개로 추정되고 있다. 예정대로 분원이 설립되면 불과 5년 남짓한 시간에 20~30%의 병상이 수도권 지역에 추가되는 것이다.
최신 설비를 갖추고 교수급 의료진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대학병원이 추가로 들어서 병상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공공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단편적인 생각이다. 의료계에서는 무분별한 분원설립으로 인해 의료 붕괴가 더욱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폭풍전야’, ‘시한부판정’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들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모양새다.
그 이유는 수도권에 자리잡는 분원들이 환자는 물론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의료 인력들마저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수도권 병상이 6600개 추가될 경우 의사는 약 3000여명, 간호사는 약 8000여 명 더 필요해질 것으로 추산했다. 해마다 편차는 있지만 대학병원급 의료기관에서 매년 300~350명의 전문의 인력을 새로 충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급격하게 막대한 인력의 수요가 단기간에 필요해지는 것이다.
급격히 필요해진 수요가 지방 의료진들을 수도권으로 향하게 만들 것이 사실상 분명하기 때문에 지역 의료계는 우려하고 있다. 지역 국립대병원의 한 교수는 “국립대 교수라고 하면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자리’라는 인식은 있지만 이미 지방에서는 국립대 의대라도 교수 채용과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도권에 대학병원이 더 들어서면 인력 유출이 얼마나 심각해질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현재에도 붕괴를 코앞에 맞이하고 잇는 지역의 필수의료 공백을 급격하게 악화시킬 것이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대구·경북 지역의 대학병원 예방의학자는 “신경외과처럼 수술을 하는 과들은 집도의가 있으면 어시스트해주는 의사도 있어야 하고 여러 의료 인력이 팀워크도 맞추는 것이 효율적이다. 지역에서는 인력이 부족해 팀 구성이 어려워 의욕적으로 수술을 하려는 교수들이 점점 더 서울·수도권 지역으로 향하게 된다”고 실상을 전했다. 김윤 교수 역시 “급성심근경색, 뇌졸중, 중증외상 등 24시간 운영이 필요한 응급의학 진료가 더욱 차질을 빚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는 사실 우려가 아닌 곧 닥칠 것이 예고된 미래에 가깝다. 의사 인력 공급은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선호도가 훨씬 높은 수도권 대학병원들이 대규모 신규 인력 모집에 나서면 어디가에는 의료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미 현재도 고액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 구인난을 겪고 있는 지역 병원들은 더욱더 그 빈자리를 채우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태호 부산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걱정은 크지만 마땅한 대책도 없는 상황”이라고 탄식했다.
가져올 결과가 불보듯 뻔했는데, 정부나 국가기관이 무분별한 분원 설립에 제동을 걸지 않는 이유도 있다. 기본적으로 병원급 의료기관의 신규 개설 허가 권한은 중앙 정부가 아닌 각급 지자체 시·도지사에게 있다. 지자체장과 지역 정치인들 입장에서 대학병원 유치는 가시적인 성과로 평가되고, 주민들 역시도 병원 이용 측면에서나 부동산 효과 등 이를 호재로 여긴다.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오히려 지역 내 대학병원 설립을 반기는 추세다.
‘병상 총량제’를 도입해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전체적인 병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어 왔다. 당시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수가 OECD 평균을 넘었고, 현재는 1000명 당 12.7개의 병상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국가이자, 평균보다 3배가량이 많다. 대학분원이 설립될 예정인 수도권 지역에서 평택과 파주, 남양주를 제외하면 병상이 부족한 지역도 없다.
그러나 그간의 흐름을 견주어보더라도 몇 년의 짧은 사이에 수도권 지역에만 대학병원 11곳이 설립되는 현상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런 현상이 집중된 원인은 2019년 의료법 개정이 발단으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병상 수 조절을 필요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병상이 과잉 공급되어 있는 시도지사가 병원 신규 설립을 허가할 때 보건복지부 장관의 동의를 얻도록 개정된 법안이다.
하지만 법안 통과 이후 지금까지 해당 법 시행을 위한 시행령과 시행 규칙 등이 마련되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다. 그 바람에 병상 규제가 강화되기 전인 지금 막차에 올라타 듯 대학병원들이 줄줄이 수도권 분원을 확장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는 분석이다.
더욱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대학병원이 들어서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온전히 수혜로만 돌아가는지도 확실치 않다. 의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지역에 병원이 생긴다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불필요한 이용과 의료비 지출이 촉발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백재중 신천연합회병원 원장도 “대학병원은 과별로 세분화된 진료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이다. 포괄적인 케어의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는 흐름 속에 대학분원의 설립은 이런 기조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최근 보건복지부가 수도권 분원의 설립 예정인 대학병원들과 조정에 나서고 있지만 개원 속도는 조절하더라도 설립 계획을 취소하거나 지방으로 옮길 의사를 밝힌 병원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저작권자 ⓒ 의사나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새롬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