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주인인지 신원 안 해도 고의성 없다면 형사 처벌 대상 아니다
- 미국 일부 주, 자격증 발급 때 열쇠공 배경 조사하기도
서울서 열쇠 수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A씨는 몇 년 전 알고 지내던 B씨의 부탁으로 회사 도어락을 열어줬다. B씨는 해당 회사의 고위 임원이었다. 그러나 A씨는 그 이후 경찰조사를 받았다. 사실은 B씨가 퇴사 직후 회사에 보복을 목적으로 도어락을 열기 위해 A씨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A씨는 “그 일 이후에는 문을 열어줄 때 무조건 집주인인지 신원을 확인한다”며 “종종 낯선 사람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에는 돈이 필요한 열쇠공들은 덜컥 문을 열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각자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부산에서 집주인이 여행을 떠난 사이 40대 남성이 열쇠공을 통해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가는 등 열쇠공을 이용한 범죄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에 수리비만 내면 집 문이 강제로 열릴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지만, 이를 방지할만한 제도적 빈틈은 여전히 보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9일 법조계 설명과 판결문 등을 종합하면, 남의 집 도어락을 무단으로 절단한 사건에서 지시한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주거침입과 함께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된다. 그러나 직접 문을 연 열쇠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달 17일 부산 연제구에서 노숙인이라 주장한 40대 남성이 열쇠공을 불러 여성 집의 도어락을 교체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어락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한 40대 남성은 주거침입 및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돼 검찰에 송치됐다. 그러나 이때도 열쇠공은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형법상 과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처벌하는데 재물손괴는 예외 사유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리비를 내고 문을 뜯어달라고 요구한 상황이라면, 열쇠공이 고의를 가지고 문을 열었다고 보지 않는다. 강승기 변호사는 “열쇠공의 경우는 집주인인 줄 알고 대상 자체를 착오한 것이기 때문에 과실로 보게 된다”며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문제는 있겠지만, 이 문제로 형사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열쇠공을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보더라도 지시한 사람과 공모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 역시도 쉽지는 않다. 이에 무단으로 도어락을 훼손하는 경우를 막으려면 사실상 열쇠공의 양심에 맡겨야 가능한 상황이다.
열쇠공에 대한 등록·허가 규정이 없는 탓에 사업장을 마련하는 데에도 제한은 없다. 열쇠협회 추산으로 국가공인열쇠관리사 자격시험도 전체 수리공 중 4%만 취득하고 있다. 열쇠공에게 신원조회를 할 수 있거나, 신원조회를 강제로 하는 법률도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앨라배마 등 일부 주에서는 공인 자격증이 있어야 열쇠공으로 일할 수 있다. 열쇠공들이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고 보고, 자격증 발급 전 미 연방수사국(FBI)를 통해 범죄 경력 배경 조사를 받아야하는 규정도 있다. 김건표 한국열쇠협회 회장은 “우리도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반성해야 하는 건 맞지만, 열쇠공이 사실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경찰서에 전화해서 신원 확인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많은 열쇠공이 아무리 정직하게 일을 해도 이런 일은 반복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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