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지원TF 이끄는 정 부회장, 인사·투자 결정권 쥐고 '작은 미전실' 운영
노조 "노사협상 파국 원인"...기술 경쟁력 약화에도 책임 지적
전문가 "막강한 권한에 비해 책임 부재...경영 투명성·혁신 위협"
삼성전자의 현 상황을 둘러싼 우려와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을 맡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회사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총수 구속 사태, 반도체 시장에서의 주도권 상실, 인공지능(AI) 시대에 뒤처지는 모습, 그리고 사상 첫 노조 파업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오죽하면 (이재용 회장을) 바지회장이라고 했겠어…"A씨는 쓴 웃음을 지었다. 삼성에서 부사장까지 지낸 그다. 지난 16일 오랜만에 만난 기자와 식사 자리를 가지던 그에게 요즘 삼성에 대해 물었다. 올해로 이재용 회장이 본격적인 그룹 경영을 맡은 지 10년이다.
그 사이 삼성은 총수 구속사태를 겪었고, 재판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반도체 신화'의 상징이던 삼성전자는 글로벌 메모리 시장에서 주도권을 잃고, 인공지능(AI) 시대에 대만 TSMC, SK 하이닉스 등에 뒤지거나, 격차를 좁히지 못 하고 있다. 사상 첫 노조 파업속에 노사 갈등과 해법도 묘연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조차도 '삼성의 위기'를 대놓고 쓰고있다.
"이건희 회장도 삼성특검 등을 겪으면서, 위기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대국민 사과에 사회환원 등… 그래도, 기업이 앞으로 먹고 살것에 대한, 미래 먹거리에 대한 통찰과 준비는…" 그는 말끝을 흐렸다. "기업 오너라면…"이라는 가정을 달고, 말을 이었다. 그 역시 고 이건희 회장과 함께 그룹과 계열사를 오가면서 일했다.
그는 "정말 정신없이 일만 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바지 회장'이라고 언급한 것은, 사실 삼성전자의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에서 '이재용 회장'을 일컫는 말이다. 회사와 임금단체협약 교섭을 진행하면서, 노조는 아예 홍보 트럭에 '바지회장 이재용'이라고 썼다.
A씨는 "(총수) 리더십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보좌하는 조직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특정인 중심으로 일부 조직이 전횡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전했다. 그에게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을 일컫는가"라고 묻자,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가 말한 '특정인'이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사업지원 테스크포스팀)이라는 것은 삼성 주변에선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현국 전국삼성노조 부위원장도 최근 기자에게 "정 부회장이 삼성의 진짜 실세라는 것은 삼성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라며 "노사 협상을 파국으로 이끈 장본인도 정 부회장"이라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은 지난 5월 노사 협상을 떠올리면서, "회사쪽 협상단과 휴일 문제까지 거의 타결을 이뤘고, 노조도 조합원 상대로 찬반투표까지 준비했었다"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회사쪽 협상 대표가 '서초에서 반려했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서 "여기서 '서초'를 상징하는 사람이 바로 정현호 부회장"이라고 덧붙였다.
노조는 지난 7월 총파업 결의대회 때 이례적으로 정 부회장 사진이 그려진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다. 손우목 위원장도 "이재용 회장이 대국민 회견에서 경영권 승계 포기와 노조인정을 약속했었다"면서 "하지만 실체는 조합원 상대로 한 부당 노동행위와 노조 탄압 그리고 사업의 부실화와 경쟁력 후퇴"라고 주장했다.
이 부위원장은 "삼성의 인사권과 돈줄을 쥐고 있는 정 부회장으로부터 삼성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라며 "(삼성의) 진짜 위기는 이재용 회장보다는 실세인 정현호 부회장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사 갈등 뿐 아니다. 최근 삼성전자를 둘러싼 대내외 시장환경이 급변하면서,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의 초격차'마저 흔들리는 등 사업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인사와 사업 전반을 조율하고 관리해 온 사업지원 TF 역할에 대한 지적도 여전하다. 그 핵심에는 정 부회장이 있다.
삼성전자 사업지원 TF는 지난 2017년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미래전략실(아래 미전실)이 해체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현재 삼성은 테스크포스(TF)를 중심으로 한 비상경영체제를 해오고 있다. 전자분야는 삼성전자 사업지원 TF, 금융분야는 삼성생명 금융경쟁력제고 TF, 나머지는 삼성물산 EPC경쟁력 강화 TF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 사업지원 TF 팀이 사실상 옛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있다. 인력 운용이나 투자 규모, 결정 등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 부회장의 입김도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지난 2022년 경기도 용인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그룹 계열사 사장단회의에서 "여러 위기가 오고 있지만 이럴때일수록 우리 실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생존이 달려있는 미래기술 발굴에 힘을 써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바로 몇 달 전(2021년 12월)에 그룹 인사를 통해 삼성전자 부회장(사업지원 TF팀장)으로 승진한 이후였다.
사실 정 부회장의 복귀와 승진을 두고 삼성 주변에서 설왕설래가 많았다고 한다. 전직 고위임원이었던 B씨는 "2017년에 큰 사건(국정농단과 이재용 구속) 이후 (그룹) 미전실이 해체됐고, 그쪽 팀장급 인사들은 검찰 조사를 받고,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면서 "물론 정 부회장도 처음엔 같은 스탠스를 취하긴 했지만, 그해 (삼성)전자로 화려하게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미전실 사장급 임원들 중에 회사(삼성전자)로 복귀한 사람은 정 부회장 뿐"이라고 덧붙였다.
옛 그룹 미전실에서 핵심은 경영진단팀과 인사팀이다. 삼성 계열사에서 그룹 경영진단팀은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였다. 계열사 내부 인사나 경영부실 등을 낱낱이 조사하고, 향후 인사와 경영에 반영한다. 미전실에서 이들 두 부서 팀장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정 부회장이다.
그의 이같은 과거 경력은 '현재의 정현호'를 지탱하게 한다. 삼성을 둘러싼 과거 정경유착과 세습경영에 대한 비판과 지적에 대해, 오너 일가의 책임도 중요하지만 이를 뒷받침 해온 내부 인사들의 충성심 경쟁도 한몫했다는 것.
그룹 내부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부터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및 증거인멸 의혹 등까지 굵직한 그룹 전반의 사건에 정 부회장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을 정도다. 검찰에선 정 부회장이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크게 관여한 것으로 판단해,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가 2017년 말 삼성전자로 돌아와 맡게 된 일은 옛 그룹 미전실에서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옛 미전실이 그룹 전략과 인사, 진단, 기획, 법무 등을 총괄한 것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회사 전략과 인사를 도맡았고, 정 부회장이 미전실에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삼성 주변에선 사업지원 TF를 '작은 미전실'이라고 할 정도다.
덕수상고 출신으로 1983년 삼성전자 입사한 정현호 부회장. 올해로 삼성맨으로 일한 지 41년째다. 엔지니어 출신 아닌, 금융과 재무쪽에 강점을 가진 그는 삼성 비서실 재무팀(1988년) 부터 줄곧 전략, 인사, 재무통으로 일해왔다. 게다가 이건희-이재용 시대로 이어지는 그룹 경영권 승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또 2000년대를 삼성 그룹 계열사 구조조정에도 크게 관여해 왔다.
'이재용의 남자', '그룹 2인자'로 불리는 정 부회장은 삼성전자 등기 임원이 아니다. 이 때문에 회사 전략과 인사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제대로 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고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삼성 비서실, 미전실 등이 국민적 비판을 받고 결국 해체 수준을 밟은 것은 다름 아닌 투명성과 책임 때문"이라며 "이재용 회장이 지난 대국민 회견에서 경영권 세습과 무노조경영 철폐를 약속했지만,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이어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비롯해 모바일 등에서 과거와 같이 경쟁업체와 기술격차를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공지능 분야에서 뒤쳐지고 있다"면서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간의 화합도 중요한 상황에서 이 역시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의사나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호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