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진 ‘관치의료와 통제’ “법·제도 개선 해야”

- 의료정책연구소, ‘국가주도 의료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고찰’ 발표... 일제가 만든 ‘조선의 료령’의 역사
- “과거에서 벗어나 의사자율성 보장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 존재”

우리나라의 의료법과 의료제도가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강압적 의료 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따라 정치계의 행정 편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관치의료와 통제는 의사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있으며, 양질의 의료가 국민에게 제공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의 법·제도적 환경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함께 떠오르고 있다.

5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의정연)가 최근 펴낸 ‘국가 주도 의료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고찰’ 연구 보고서를 발췌한 내용이다. 의정연은 의사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왜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를 국가의 권력, 또는 관치가 통용되는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지 그 기원을 찾기 위해 이번 연구를 진행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는 끊임없이 의료계를 통제하려 했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료계의 투쟁 역사 속에 의료체계가 발전해왔다. 최근 사례만 봐도 건강보험공단 등에 특별사법경찰권을 부여해 의료계를 단속하겠다는 시도가 진행됐다. 의료계는 해당 제도가 의료의 자율성 및 의사의 전문직업성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의료계를 잠재적 범법자로 여기는 것으로 사법경찰권의 남용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보고서는 “의료 영역에 경찰력을 투입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의료를 관치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제 강점기시대의 유산이며, 이 연구가 주목하는 곳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라며, 국내 ‘관치의료’의 기원을 찾기 위해 국외와 국내 자료 및 의료관계 법률의 제정과정과 변천사를 종합적으로 수집, 분석해 연구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료법과 제도의 원형은 일제 식민시대에 만들어졌고,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에 따라 그 원형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에 의한 의료 통제가 처음 시작된 것은 18세기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국가 전역에 퍼진 전염병을 관리하기 위해 경찰이 위생행정을 장악하고 운영하는 ‘의사경찰’의 개념을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을 불법 식민 지배할 당시 이러한 ‘의사경찰’의 개념을 도입해 국가가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위생행정을 구현하는 ‘위생경찰’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위생’이라는 명분 하에 경찰에 의한 각종 통제와 단속 위주의 방역을 실시했고, 이러한 강압적 통제 기제는 국가권력이 개인 생활의 근저까지 침투하는 도구가 됐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기존의 ‘위생경찰제도’는 폐지됐고, 미국식 ‘보건후생국’이 설치됐다. 미군은 이를 통해 공중보건 부분은 국가가 담당하고 진료서비스를 민간이 담당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치는 등 변화를 꾀했다.

하지만 약 3년간의 미군정 통치 기간 동안 국가의료행정이나 의료법령에서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에 경찰이 담당했던 위생행정업무가 가지고 있는 방역·법률 등의 복잡성과 감독직의 특권적 요소 등으로 새로운 형태의 변화에 지역 단위의 거부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통제는 그대로 이어져 국가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의사를 동원하는 것은 마치 매우 당연한 것처럼 간주됐다. 실제로 이러한 위생경찰의 업무가 내무부에서 보건사회부로 실질적으로 인계된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 지나고 나서였다. 의사 집단이 일부 저항하기는 했지만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급속한 근대국가를 이뤄야 했던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관치주의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의료관련 법제 또한 일제가 1944년에 제정한 ‘조선의료령’이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유지됐고,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의사 부족이 심해지자 급하게 의사를 동원하기 위해 ‘국민의료법’이 제정됐다. 해방된 지 6년이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의료법인 ‘국민의료법’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료령’은 일제가 만든 국가적 개입과 통제의 도구였고, ‘국민의료법’은 ‘조선의료령’에서 강제하고 있었던 국가통제의 기제를 그대로 재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62년이 되어서야 현행 ‘의료법’으로 명칭이 개정됐고, 최근까지 40여 차례의 개정이 있었으나, 그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보고서는 “현재 의료법의 뿌리가 일제강점기 동안 강압적 방식으로 구현된 식민통치가 파생시킨 부산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의료법이 일제 잔재인 ‘조선의료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조항에서 드러난다. 단적인 예는 1962년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 온 ‘의료법’ 제15조 제1항으로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는 진료 금지 조항이다.

그 뿌리는 진료거부금지 의무를 처음 규정한 1944년 8월 21일 제정된 ‘조선의료령’ 제10조에서 찾을 수 있으며 해당 조항은 1951년 9월 25일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22조를 거쳐 현행 ‘의료법’ 제15조의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물론 조항의 구체적 내용은 소폭 변경됐지만 그 정당성에 관한 특별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히려 벌칙의 정도가 강화됐다.

진료거부 금지 조항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진료’라는 의사의 직무 수행에 있어 의사의 직업윤리를 형벌로써 강제해 의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의료계는 보고 있다. 실제로 미국·프랑스·영국 등 해외 선진국의 경우 ‘의사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진료거부가 가능하다.

보고서는 “의료법 등에서 포괄적인 형태로 진료거부금지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유일하며, 일본에서조차 진료거부금지 의무위반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에 동 조항은 선언적 의미로서 기능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의료는 오랜 기간 국가의 행정 편의에 따라 통제돼왔고, 최근까지도 이러한 국가주의적 이념이 반영된 통제 일변도의 정책과 제도, 법으로 전문가 집단인 의료계와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보고서는 “국가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의사와 의사 집단을 자의적으로 쥐락펴락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남발이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의사들이 전문직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자율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국민에게 양질의 의료를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의정연 보고서의 핵심이다.

보고서는 “의료제도는 국가 자원 중 상당한 부분을 소비하고 모든 국민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이 특정 정치집단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운영된다면, 그리고 전문가적 판단과 결정의 영역이 관치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 공무원들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 부정적 결과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 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같은 연구 성과는 국가정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에 대해 정당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동시에 의료전문가에 의한 자발적 참여를 제고하고 나아가 법제도 개선 및 정부 정책 개선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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