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앞 월대 터 발굴... 일제시기 전차선로 깔며 훼손
약 100년 전 일제가 전차 철로를 깔며 뭉개진 채로 땅속에 묻혔던 ‘왕의 계단’이 한 세기가 지나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법궁 건축물로 1866년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증건한 경복궁의 위엄을 드러내던 정문 광화문 앞쪽 들머리에 있던 ‘월대’의 어도(임금이 걷는 길) 계단과 기단부 등 옛 모습의 자취가 뚜렷한 모습이 약 1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25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 광화문 문루 앞 대로 아래 땅속을 집중 조사한 끝에 문루 들머리로 진입하는 인공통로 얼개의 구조물인 월대의 주요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조사 내용을 보면 월대 전체 규모의 남북길이 48.7m에 동서 너비 29.7m에 달한다. 유적의 핵심인 어도는 광화문 중앙문과 맞다은 넓이 약 7m 정도의 통로로 추정된다. 비교적 원형 모습이 남아있는 월대 동쪽 유적을 발굴하면서 월대의 전체 모습 등도 재구성 할 수 있게 됐다. 월대 복원을 위한 실물 자료도 현장에서 다량 확보했다.
1865년부터 1868년 3년여 간의 경복궁 중건 공사 과정을 상세히 집필한 <경복궁 영건일기>와 1890년 이후 사진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광화문 월대는 장대석을 다듬은 길쭉한 모양의 기단석과 계단석, 난간석을 두르고, 내부를 흑으로 채운 건축 구조물이었다. 국내 궁궐 중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방식이 사용된 것은 광화문이 유일했다.
실제로 발굴 조사한 결과도 기록과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월대 터의 세부 구조는 간단치 않았다. 우선 동쪽과 서쪽 외곽에 다듬어진 장대석(길이 120~270㎝, 너비 30~50㎝, 두께 20~40㎝를 써서 2단의 기단을 쌓았다. 기단석 하부에 여러 개의 지대석을 놓고 붉은 점토와 깬돌을 보강해 기초를 다진 뒤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번갈아가면서 쌓는 뒷채움 방식으로 주변보다 높게 대를 이룬 시설물을 구축했다. 월대 남쪽에도 장대석을 써서 계단을 만들었다. 어도와 연결되는 중앙부는 소맷돌을 써서 동쪽 서쪽 계단과 분리한 것이 특징적이다.
하지만, 어도계단 터는 일제강점 초기인 1923년 전차선로에 의해 훼손되고 파묻혔고 부재들도 흩어졌다. 다행히도 조사과정에서 소맷돌을 받친 지대석이 나와 월대 원형을 복원하는 데 소중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 건립되어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사라지기 전까지 월대는 크게 4단계로 나뉘어 변해왔던 것도 이번 조사 결과 드러났다. 1단계는 월대 축조 당시의 양상으로 남쪽에 경계가 나뉘어 있는 3개의 계단이 있었고 월대를 위에서 바라본 형태는 역철자형(凸)의 모습이었다.
2단계에선 중앙에 위치한 어도계단의 터가 경사진 길로 변했으며, 3단계에서는 경사로의 범위가 확장되어 계단이 동서 외곽을 제외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첫 외줄 형태의 전차선로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들어선 4단계에서는 전차선로가 겹줄이 되어 월대 시설이 사실상 거의 파괴되면서 난간석 등 남은 구조물도 모두 철거됐다. 광화문 문루가 경복궁 궁역 동쪽 담장으로 이전할 때 월대의 시설 파편들도 근대 도로의 부재로 쓰였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훼손된 뒤 동구릉 등에 옮겨졌던 난간석, 하엽석 등의 월대 부재를 다시 써서 월대를 복원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쓰는 장인들의 작업을 통해 월대를 진정성 있는 역사 유적으로 되살리겠다고 본부 쪽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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