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생부터 '의대반' 성행... 정치권에서도 의대 유치 바람 불어
- 정년 그대로인데 평균 수명은 늘어, 은퇴없고 소득높은 의사 더욱 조명받아
- 과도한 의대 쏠림, 국가 경쟁력 약화·교육 시장 왜곡 등으로 이어질 것
수년 전부터 교육계를 장악한 초등 의대반 같은 과열 경쟁과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변형되고 있다. 정치권도 총선 1년 여를 앞두고 의대 유치를 통한 표심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전남에선 1년 전부터 목포·순천 등에 의과대학을 설치하기 위한 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학원장 김(52)씨 “서울의 ‘초등 의대반’처럼 고교 수준의 내용을 선행해서 가르치진 않지만 초등학교 범위 내 최고난도의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하는 심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곳 초등학교 부모들이 의대 진학 문의를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골의 학원가들도 변하고 있다. 과거엔 교대나 경찰대 준비반이 많았는데 요즘엔 대부분 ‘의대반’이 대새”라고 전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교육계의 고질병이 지역 살리기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정된 삶을 원하는 학생·학부모, 지방소멸 위기에 직면한 대학·지자체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의대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의대 블랙홀’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목동 등의 입시 블랙홀은 의대 입시반의 연령을 더 낮추고 있다. 학원들은 재수생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생까지, 서울에서 지방까지 교육 대상을 넓히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지방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이 최소 40%로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교육 낙후 지역이었던 지방으로까지 관련 사교육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고교생이 지역으로 역유학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재수학원에서는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N수생’ 마케팅이 자리 잡았다. 교육부가 민형배 의원실(무소속)에 제출한 바에 따르면 지난 3년(2020~2022) 동안 18개 의대의 정시 합격자 중 79%는 N수생이었다. 재수생이 43%, 삼수생 23%, 4수 이상 13%였다. 현역(고교 재학생) 합격자는 21%에 불과했다. 강남의 한 재수종합학원 관계자는 “올해 의대 재수반은 전년도보다 문의가 20~30% 늘었고 마감도 일주일 더 빨랐다”고 말했다.
의대를 노리는 수험생이 많다는 건 지방대나 지자체가 의대 유치전에 뛰어드는 이유가 된다. 최근까지 12곳이 도전하고 있다. 한 지방대는 의대가 없는 다른 지방대에 “통합 후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특수목적대학인 카이스트(KAIST), 포스텍(POSTECH) 등도 의과학대학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가평군을 지역구로 둔 최춘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9일 “경기도의 인구대비 도내 의과대학 정원수가 전국 꼴찌”라며 대진대에 의대 설립을 촉구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안동시의회는 지난 17일 여야가 만장일치로 안동대 의대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대통령실과 국회, 보건복지부에 전달했다.
무분별한 의대 유치 경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봉환 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는 “서남대학교는 의대가 있었는데도 폐교했다. 지금은 의대가 서울에 공대보다 높지만, 의대가 난립하게 되면 결국은 또 후발 주자나 열악한 지역에 있는 의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며 “수요가 쏠린다며 단기적인 안목으로 의대를 늘려선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평생직장’에 가깝고 고수입이 보장되는 의사의 인기가 높은 것은 어제오늘일은 아니다. 교육부의 지난해 대학 졸업생 취업 현황에 따르면 취업자 월평균 소득 수준은 의약계열(327만 9000원), 공학계열 (294만 8000원), 사회계열(262만 2000원) 순이었다. 채장균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 연구원은 “평균 수명이 길어진 반면 기업 정년은 60세로 멈춰있자 은퇴가 없는 전문직, 그 중에서도 소득이 높은 의사가 더욱 조명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도한 의대 쏠림이 국가 경쟁력 약화, 교육 시장 왜곡 등의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국장은 “소수의 의대생이 사교육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채창균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직업별 경제 성장 기여도에 대한 논문들을 보면, 엔지니어는 플러스 되는 반면 변호사는 마이너스가 나온다”며 “좋은 인재들이 공학 계열 등 더 생산적인 곳에 가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성호 대표는 “본질적으로는 다른 직군보다 의사의 연봉이나 안정성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지원이 쏠리는 것”이라며 “엔지니어 대우가 더 좋으면 학생들은 자연스레 공대를 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봉환 교수는 “많은 대학이 어떻게든 신입생 머릿수를 채워야 한다는 게 급선무가 됐고 지역 정치인들도 재선 등 자기 목적의 달성 방편으로 의대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라며 “고육지책으로 의대를 유치하려고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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