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사 “‘고의 아니어도 형사처벌’ 의사를 어떻게 하라는거냐”

- 스기와라 일본내과의사회회장, 대한내과의사회 추계학술대회 참석
- “일본은 악의적인 경우에만 처벌, 민사에서도 10억 원 이상 배상 안 해”
- 박근태 대한내과의사회회장 “의사는 신 아니다, 반드시 의료분쟁특례법 제정해야”

악의적인 고의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해 10억 원대의 손해배상 청구가 내려지는 것은 물론 벌금, 금고 등 형사처벌이 내려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 의사가 한국 의사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듣고는 경악했다. 일본의 경우 고의과실이 아닌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하지 않으며 손해배상소송 역시 10억 원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도 설명했다.



22일 서울시 중구 롯데서울호텔에서 열린 대한내과의사회 추계학술대회에는 일본임상내과의사회 스가와라 마사히로 회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스가와라 회장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의사가 형사처벌된 사례를 설명한 이동필 변호사의 발표 내용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날 오전 발표된 내용은 일본어로 동시통역을 통해 스가와라 회장에게 전달됐다.

스가와라 회장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의사를 하고 진료를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경악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가와라 회장은 전날인 21일 있었던 내과의사회 임원들과의 만남 자리에서도 고의 과실이 아닌데 의사가 의료사고로 인해 형사처벌까지 받고 있는 한국의 행태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가와라 회장은 “황당하다. 전세계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도 또 있을까”라며 “일본의 경우 의료사고로 의사가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는 고의과실일 경우에만 한정되고, 악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형사소송에 휘말리지 않는다. 민사소송에서도 10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액이 결정되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에서도 산부인과 전문의가 분만 과정에서 발생한 의료사고로 형사처벌을 받은 뒤 일본 내 상황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지금의 한국처럼 분만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분만 시설, 인력의 부족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의사의 법적 부담을 완화하자는 여론이 형성됐고, 그 뒤로는 고의적인 의료사고가 아니라면 형사처벌하는 사례가 거의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내과의사회 박근태 회장은 이날 스가와라 회장의 발언 뒤를 이은 발언에서 이같은 일본 내과의사회 관계자들과의 간담회 내용을 전하며 “일본은 의료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의사회 내 설치되어 있는 의료분쟁조정위원회에서 대부분 합의와 조정이 이뤄지고, 민사소송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10~20%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박 회장은 “스가와라 회장 등 일본 내과의사회 관계자들에게 응급실 뺑뺑이 책임을 물어 최초 진료 전공의가 형사 입건 위기에 놓여있는 등 자세한 구체적인 사례는 설명하지 못했다”며 “이런 상황이 너무 창피하다”고도 토로했다.

현재 국내에 일본과 같은 의료사고에도 의료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보단 강력하게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도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필수의료 분야의 ‘사법 리스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의과대학 정원을 확대하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법원이 의료의 특성을 무시하고 필수의료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라며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선 ‘의료분쟁특례법’부터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분쟁특례법에는 고의에 준할 정도 수준의 의료과실, 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의료행위를 제외하고 의료배상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의료인 형사처벌을 면제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도 했다.

박 회장은 “의료계가 힘을 합쳐서 ‘의료분쟁특례법’을 만들어야 필수의료를 살릴 수 있다”며 “내과 분과 전임의 지원 과정에서도 특정 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답이 나와있는데 정부와 국회의원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필수의료 분야의 법적 부담 완화도 추진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이마저도 우선순위가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앞서 정부는 특례법을 제정하거나 현행 의료분쟁조벙법을 개정해 의료인 형사처벌특례 범위를 확대하고 필수의료 분야 의료배상책임보험 가입을 지원하겠다고도 설명했다. 또한 의료계, 환자단체, 법률전문가 등으로 의료분쟁제도개선 협의체를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박 회장은 법적 부담 완화를 시행한 뒤 의대 정원 확대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정부가 발표만 했을 뿐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대 정워 확대 논의를 하기 전 법적 부담부터 완화해야 한다. 선결 조건이 소신 진료 환경 구축”이라고 강조했다.

건강보험 급여 진료만으로는 절대 수익이 날 수 없는 구조도 꼭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수가 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필수의료를 살릴 의지가 있다면 정책적으로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도 꾸준히 의료분쟁특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협 이필수 회장은 이날 정총 축사를 통해 “필수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의료인에 대한 법적 안전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OECD 평균 이하인 의사 수를 늘리면 낙수효과로 (필수의료 분야에) 간다고 말한다”며 의료사고특례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정부와 의대 정원을 비롯해 필수의료 분야 문제를 해결할 합리적 방안을 도출해 내겠다”며 ‘끝없는 소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대한개원의협의회 김동석 회장도 “고의 과실이 아닌 의료사고에 책임을 묻는” 상황을 바꾸려면 의료분쟁특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과의사회는 이날 정총에서 ▼소신진료 보장하는 특례법 제정 ▼필수의료 형사처벌 중단 ▼비대면 초진 확대 반대 ▼졸속 추진 의대 증원 반대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저작권자 ⓒ 의사나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