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당근책'에도 복귀 거부... "2020년 합의 파기, 이번엔 끝장 봐야"
필수의료 살리겠다더니 오히려 악화만... 9월 전공의 모집 확대도 '인기과 쏠림' 우려
짓밟힌 자존심, 무너진 신뢰... "선배들은 4개월간 무얼 했나" 기성세대 비판도
의료계와 정부 간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전공의들의 병원 이탈 사태가 4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정부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전공의들은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오히려 상황이 변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외과 전공의 출신 A씨의 사례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A씨는 지난 2월 말 동료들과 함께 수련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났다.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직서는 수리되지 않은 상태다.
A씨는 "돌아가고 싶지만 이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강경한 입장 뒤에는 과거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2020년 9월 4일 작성된 의정합의문이 정부에 의해 무시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A씨를 비롯한 많은 전공의들은 이번에 확실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몇 년 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A씨는 "이번에 그냥 들어갔는데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생기면 그때는 의료계의 힘이 더 약해질 것"이라며 "그래서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현재 사직한 전공의들 대부분이 4년 전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신설 정책에 반발해 의사국가시험을 거부했던 세대라는 점도 그들의 강경한 입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공의들은 당초 4월 총선 이후 상황이 변화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여당인 국민의힘이 108석을 얻는데 그치며 사실상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정책 방향은 변화하지 않았다.
A씨는 "총선을 기점으로 정책 방향이 바뀔 줄 알았다. 4월이면 어떻게든 해결돼서 복귀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벌써 7월이다"라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그는 현재 사직한 동료들과 모이면 "내년 3월에는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전공의 복귀를 위해 다양한 '당근책'을 제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조규홍 장관은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중단(철회), 2월 기준 사직서 처리, 수련 특례 마련, 근무시간 단축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A씨를 비롯한 많은 전공의들은 이러한 제안에 대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 요구사항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백지화'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공의들은 정부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A씨는 "의정합의조차 쉽게 깨버리는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제안에 대해서도 "우리를 처우 개선을 원해 나온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정부는 변한 게 없다"고 비판했다.
2025학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가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A씨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2025학년도 증원을 수용하고 넘어가면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다"며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의대 증원의 필요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정확한 추계를 제시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수긍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국회 청문회에서도 2,000명 증원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3개월 만에 증원 규모를 491명 줄인 점 등을 들어 "증원이 근거 없이 이뤄졌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A씨는 필수의료 분야 의료 인력 확충을 위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시스템 문제에 기인한다"며 "고위험 중환자를 치료하는 분야에 더 많은 보상이 이뤄지는 수가체계여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상태에서 의사 수만 늘리면 오히려 의료체계가 더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공의들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또 다른 이유로 A씨는 "짓밟힌 자존심"을 꼽았다. 그는 정부의 '낙수효과' 발언과 '남성 의사와 여성 의사의 근로시간 차이' 발언 등을 예로 들며 "필수의료과는 낙수과가 됐고 그 과를 전공하는 의사들은 낙수의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9월에 2024년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을 모든 과로 확대해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A씨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 조치로 인해 일부 전공의들의 복귀율이 올라갈 수 있지만, 그들이 복귀하는 곳은 필수의료과가 아닌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 '인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결국 이 조치는 수도권, 대형병원, 인기과로의 쏠림 현상만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A씨는 인터뷰 내내 "병원, 환자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이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도 강했다. 그는 앞으로의 의료환경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재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기성세대인 선배 의사들에 대한 비판도 제기했다. 그는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선배 의사들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내부적으로 의대 정원 관련 논의나 대책 수립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의사나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하준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