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잘못 지급된 보험금이라도 보험사가 환자 대신 의사에게 청구 못해”

- 가입자들이 재산이 없는 등의 ‘보전필요성’이 인정될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한다고 판결
- “위법한 비급여 의료행위를 이유로 채권자대위권 행사 시 가입자의 자유로운 재산관리행위에 부당한 간섭”

잘못 지급된 보험료라도 보험사가 가입자들을 대신하여 의사에게 진료비를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보험사의 권리를 지키지 못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돈을 요구하는 경우이거나 가입자들이 재산이 없는 등 ‘보전 필요성’이 인정될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이유에서다.



25일 오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삼성화재해상보험이 의사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파기자판(파기환송하지 않고 대법원에서 직접 판결)을 통해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각하 판결했다. A씨는 환자들에게 트리암시놀론(Triamcinolone, 피부염 치료 등에 사용되는 스테로이드성 약물) 주사를 투여하고 약 3,800만 원의 진료비를 받았다. 삼성화재는 진료비 상당의 보험금을 환자들에게 지급했다.

환자가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할 때는 건강보험 등이 적용되는 급여와 그렇지 않은 비급여로 구분한다. 이 중 신의료기술평가를 받고 안정성과 유효성이 인정되지 않은 의료행위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 비급여에 해당한다. 삼성화재는 트리암시놀론 주사가 신의료기술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A씨에게 진료비를 돌려달라고 소를 제기했다.

A씨는 사실상 비급여 의료행위를 한 뒤 진료비를 받았고 환자들은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라는 게 삼성화재 측의 주장이었다. 이런 경우라면 삼성화재와 같은 보험사들은 환자들에게, 환자들은 의사에게 각각 소송을 제기해 보험금을 돌려받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이다.

다만 삼성화재는 보험금을 지급한 환자들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닌 진료를 한 의사에게 직접 진료비를 환급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화재가 환자들을 대신하여 권리주장을 한 것으로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한 셈이다. 1심과 2심에서는 삼성화재의 손을 들어줬다.

채권자대위권이 행사되기 위해서는 채권자는 채무자가 재산이 없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는 삼성화재가 환자들이 재산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채권자가 채무자의 권리를 대신 행사하지 않으면, 권리 이행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필요성도 인정되어야 한다. 1심과 2심에서는 삼성화재가 채권자대위권 행사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판결했다.

1심에서는 삼성화재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A씨에게 3,846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고, 2심에서도 채권자대위권 행사 요건을 갖췄다고 판단하여 삼성화재 측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반환금은 2,730만원으로 줄었다.

그러나 대법원 전합에서는 삼성화재의 채권자대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채권자가 지키려는 권리가 무엇인지 그것이 대위권 행사로 얻을 수 있는 권리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기존 전합의 판례이다. 돈에 관한 권리라면 채무자가 자기 재산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즉, 채권자의 권리를 보전할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전합의 설명이다. 보험금을 받은 환자들이 재산이 있다면 채권자인 보험사로서는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내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보유한 채권을 간편한 절차로 회수하려 채권자대위권 행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처럼 손해보험의 일종인 실손의료보험계약에 따른 보험금의 지급 과정에서 보험사가 그 손실을 만회하고자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하는 사례가 있다. 이 경우에는 보험 가입자의 재산 능력과 관계없이 보험사의 채권자대위권 행사를 인정한다면 가입자가 가진 채권보다 우위에 있는 담보권을 보험사에 부여하는 것이므로 부당하다고 덧붙였다. 또, 채권집행과정에서 모든 채권자가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 민사집행법 체계에도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명시적인 법에 의하지 않고 채권자대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만 효력을 가진다는 ‘채권의 상대효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되었다. 이외에도 전합은 보험사가 위법한 비급여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채권자대위권을 행사한다면 가입자의 자유로운 자산관리행위에 부당한 간섭이 될 수 있다며, 전합은 삼성화재가 보험 가입자들의 재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점, 채권자대위권 행사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 점을 이유로 각하 판결을 내렸다.

다만 일부 대법관들은 반대의견을 내기도 했다. 전합의 13명의 대법관 중 5명의 대법관은 “금전채권 보전을 위한 채권자대위권 행사에서 채무자의 무자력을 요구하며 보전 필요성을 엄격하게 인정하려는 다수의견의 태도는 무자력 요건을 완화하여 채권자대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범위를 확대해 온 판례의 기본적인 방향과 다르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어 “채권자인 보험자가 피보험자에 대해 갖는 피보전채권과 채무자인 피보험자가 요양기관에 대해 갖는 권리, 즉 대신할 권리는 두 채권의 발생원인, 내용과 목적 등에 비춰 밀접한 관련성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보험자의 채권자대위권 행사가 피보험자의 재산관리에 부당한 간섭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며 “피보험자는 보험자가 진료행위의 당사자인 요양기관을 상대로 부당한 이익의 반환을 구하도록 해 자신은 분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 피보험자의 의사나 거래 관념에 부합하고 바람직하다”고 봤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관련 소송과 보험업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지난 3월 안전성이 인정되기 전 ‘맘모톰(Mammotome, 진공흡입기 등을 이용한 유방종양절제술) 시술을 받아 실손보험금이 지급된 사건에 관한 공개변론을 열었다. 이 사건 역시 신의료기술평가를 받기 전 맘모톰 시술을 한 것이 적법한지, 보험사가 환자들을 대신하여 의사에게 진료비를 직접 반환 요구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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