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故이건희 회장 5,000억 원 기부에도 중앙의료원 신축 이전 병상 300개 줄여
- 기재부 “수도권 지역 초과 공급과 병상 가동률 저조로 인한 조치”
- 의료계 “필수의료 붕괴를 초래하는 공공의료 포기 선언”
신종 감염병의 대응 역량과 필수의료 역량 확충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의 신축·이전 사업이 대폭 축소되면서 보건·의료계가 반발에 나섰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총 1,050개 병상의 신축·이전을 요구했지만 기획재정부는 이보다 300병상이 적은 760병상 규모로 총사업비를 조정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18일 의료계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최근 국립중앙의료원의 신축·이전 사업규모를 보건복지부와 의료원의 요구안보다 대폭 축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앞서 복지부와 의료원은 본원 800병상,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 150병상, 중앙외상센터 100병상 등 총 1,050병상 규모의 신축·이전 사업비를 요구한 바 있다.
기재부는 지난 4일 최종적으로 760병상 규모의 의료원 신축·이전 사업으로 결정하고 총 사업비가 조정됐다고 통보해왔다. 본원은 526병상으로 복지부·의료원 요구안인 800병상보다 274병상 줄었다.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은 134병상으로 요구안인 150병상보다 16병상 감소했다.
기재부의 이러한 결정에 보건·의료계는 즉각 반발했다. 의료원 총동문회는 16일 성명서를 내고 "총사업비 조정 심의 결과, 본원 병상 수를 계획안에서 대폭 축소한 것은 그동안 정부가 주장한 국가 공공의료 컨트롤타워로서의 기능과 역할 증대를 포기한 것"이라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소임을 다해온 의료원 가족과 동문들의 사기와 자존을 무너트리는 처사로서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의료원 전문의협의회도 같은 날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참석자 98% 찬성으로 기재부 결정을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의협의회는 "감염병 위기 등 재난 상황 시에 필수의료 및 의료안전망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임상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는 총 1,000병상 이상의 규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의협의회는 대규모 본원 병상을 운영하는 해외 병원 사례도 들었다. 싱가포르의 탄톡생병원은 음압 격리병상 330병상과 별도로 본원에 1,720병상을 갖췄다. 홍콩감염병센터는 1,753병상, 독일 샤리떼 병원은 본원 병상이 3,001병상에 달한다.
정치권에서도 기재부의 결정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17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의료원을 단순히 개인 동네병원으로 바라보는 기재부의 본질적인 시각 자체가 잘못됐다”며 “국가중앙병원의 기능과 역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자 보건의료와 의료기관을 모르는 비전문가들의 글자놀음으로 공공의료 백년대게를 망치려는 망국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한 “기재부가 고(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유족의 기부 약정을 위반하고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 병상 수를 축소했다고 지적했다. 이 전 회장 유족은 2021년 의료원에 7,000억 원을 기부하며 이 중 5,000억 원을 150병상의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 건립에 써달라고 요청했다.
기재부는 의료원 병상 수는 수요·공급 현황 등 전문기관 검토를 거쳐 산정했다는 입장이다. 또한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 병상 수와 관련해서는 삼성그룹의 기부 약정 취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유관기관 간의 협의를 거쳐 결정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조세재정연구원은 의료원 신축·이전 사업 계획 적정성을 재검토하여 2개 안을 도출했다. 현재 의료원 본원 병상 수인 496병상 그대로 신축·이전하는 안과 596병상으로 확대하는 안이었다. 기재부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진료권 내 병상 초과 공급 현황, 의료원의 낮은 병상 이용률, 공공의료 확충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526병상을 본원 적정 병상 수로 정했다"고 밝혔다. 조정된 사업안대로 신축·이전되면 의료원의 실질적인 병상 수는 현재보다 100병상 증가한다고 덧붙였다.
의료원이 위치한 수도권에 종합병원만 15개로 오는 2030년까지 병상 수요가 약 550개 초과한다는 게 기재부 설명이다. 또한 현재 의료원 병상 이용률이 약 70% 수준으로 지방의료원 평균 이용률인 86.7% 대비 낮다는 점도 526병상 산출의 근거가 됐다.
의료원 신축·이전 사업은 지난 2003년부터 계획됐다. 본래 서울 서초구 원지동 이전 방안이 제시됐으나 문화재 조사와 소음 기준 미충족 등으로 사업이 지연됐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COVID-19)로 공중보건 위기 상황이 닥치자 사업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이 전 회장 유족이 의료원에 7,000억원을 기부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150병상 규모 중앙감염병 전문 병원이 설립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모였다.
의료원 신축·이전 사업을 두고 보건·의료계와 정부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의료원 총동문회는 기재부의 결정 철회를 요구하며 "총동문회의 순수하고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향후 강력한 투쟁도 불사할 것임을 밝혀둔다"고 경고했다.
기재부는 "향후 (의료원) 병상 수 확대는 감염병, 중증 응급, 외상 등 필수의료 대응을 위한 의료원의 기능과 역할을 고려하여 적극적으로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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