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으로부터 100번의 지령문을 받은 뒤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석모 전 민주노총 조직쟁의국장을 체포한 숨은 공신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우리 속담인 것으로 밝혀졌다.
11일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월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국가정보원과 경찰 측은 민주노총과 산별노조 압수수색을 통해 석씨가 쓰던 PC를 확보했으나 암호자재를 찾지 못해 실마리를 전혀 풀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의 지령문은 암호가 걸린 문서, 이를 담은 USB 자체의 암호, 다른 매체에 별도로 저장된 문자·숫자·기호 등 장문의 ‘암호자재’를 동시에 복사·붙여넣기를 해야 열리는 삼중잠금 장치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정원 등이 압수수색을 할 때 석 씨는 수사관들을 향해 ‘별거 없지 않느냐’며 태연하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공안 수사에 정통한 한 정부부처 관계자는 “사안마다 암호자재가 모두 다르고 배열도 정교해 슈퍼컴퓨터로 돌려도 보통 1만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고 설명했다.
북한 지령문을 해독하기 위해선 단순히 암호만 입력하는 방식이 아닌 USB 삽입, 각 프로그램 실행 등의 순서까지 지켜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또 공작원들이 정기적으로 암호자재를 변경하는 만큼 ‘구버전’ 암호자재는 확보하더라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압수수색으로 자료를 확보하고도 이를 한달 반이 넘도록 암호해독에 골머리를 앓았다.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새벽까지 암호해독을 하기 위해 야근을 하던 국정원이 석 씨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다른 저장매체 속 문서파일을 살펴보다 어느 문서의 파일 중간 부분에서 ‘rntmfdltjakfdlfkeh...’ 문구를 발견하곤 특이점을 찾아낸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이를 한글 자판으로 고스란히 입력하니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었다.
이 순간이 지령문을 해독하는 것에 필요한 암호 자재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국정원과 검찰은 지령문이 담김 USB의 별도 암호까지 뚫고 북한의 스태가노그래피(기밀정보는 파일, 이미지, 메시지 등에 숨기는 심층 암호기술)까지 해독하는 것에 성공했다.
공안당국이 확보한 북한 지령문은 약 4년치(2018~2022년)로 114건에 달했다. 주요 내용은 ▶주요 통치기관들에 대한 송전망체계 자료 입수(2019년) ▶화성·평택지역 군사기지 및 화력발전소·항만 등 비밀자료 수집(2019년) ▶일장기 화형식·일본인 퇴출 운동 등 반일투쟁으로 반일감정 고조(2019년)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로 반일민심 부추기기(2021년) ▶노조 동원 윤석열 정부 반대 투쟁 주문(2022년) 등이다.
이 외에 해외서적 구입 및 선진국에서 말을 키우는 방법 등에 대한 정보 수집 지령도 포함돼있었다고 한다. 북한 지령문을 우리 공안당국이 풀어버린 걸 나중에 알고는 석씨의 눈빛이 흔들렸다고 한다.
수원지검 공공수사부는 이 같은 수사를 통해 지난 5월 석씨 등 민주노총 간부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특수잠입·탈출, 회합·통신, 편의제공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들은 북한 지령문 수령 외에도 2017~2022년 중국 광저우, 캄보디아 프놈펜, 베트남 하노이 등에서 북한 노동당 산하 대남 공작기구 소속 공작원을 수차례 접촉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20년 6월~2022년 9월 대북통신용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조직원들과 접선할 수 있는 신호방법을 만든 혐의도 사고있다.
이들 민주노총 간부 4명에 대한 3차 공판준비기일은 10일 수원지법 형사14부(부장 고권홍)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위원장 등 2명은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한다고 의사를 밝혔다. 반면 석씨와 민주노총 전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은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하지 않았다. 변호인들은 한 차례 더 공판준비기일을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재판부는 “기소된지 몇 개월이 흘렀기 때문에 공판 절차를 빨리 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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